이번 시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인 오스카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한 여인과의 광기 어린 사랑으로 인해 강렬한 감정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며, 클림트와 에곤 쉴레와 함께 빈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그의 생애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세계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스카 코코슈카의 생애
코코슈카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푀힐라른에서 태어나 3살 때 빈으로 이사하였고, 빈 미술공예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은세공사였으나, 산업화로 인해 가정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코코슈카는 수공업의 부활을 옹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빈공방에 참여하고, 클림트의 금박 및 은박을 사용한 작품을 지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코코슈카의 작품은 종종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탐구하며,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후에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출생: 1886년 3월 1일, 오스트리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사망: 1980년 2월 22일, 스위스의 몬트뢰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육: 비엔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이후 다양한 예술적 영향을 받았다.
● 예술적 경향
표현주의: 코코슈카는 표현주의 화가로, 감정과 주관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그림은 종종 강렬한 색상과 비현실적인 형태로 특징지어진다.
주요 작품: 그의 대표작으로는 "자화상"과 "여자와 고양이"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은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감정적 깊이를 잘 보여준다.
● 주요 테마
사랑과 상실: 코코슈카의 작품은 종종 사랑과 상실의 주제를 다루며,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유명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아내인 알마 마흐러(Alma Mahler)와 연인 관계였던 코코슈카는 두 사람의 관계로부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창작했다.
전쟁과 고통: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고통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 주요 작품과 전시
전시회: 코코슈카는 1908년과 1909년의 분리파 전시회 쿤스트쇼에 작품을 출품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 개인적 삶
알마 마흐러와의 관계
첫 만남: 코코슈카와 알마는 1911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알마는 이미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한 상태였으나, 두 사람은 강한 끌림을 느꼈습니다.
사랑의 시작: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그녀를 모델로 한 여러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유명한 자화상 중 하나는 알마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감정의 갈등: 알마는 코코슈카와의 관계에서 강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남편인 말러와의 결혼 생활로 인해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극작가, 시인이었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1886-1980)는 클림트가 이끌었던 분리파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클림트, 에곤 쉴레와 함께 세기말 오스트리아 빈의 벨에포크 시대를 이끌었다.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 쉰들러와의 열정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그림이 바로 아래에 있는 '바람의 신부'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하여 머리에 총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부상에서 회복하긴 했지만, 코코슈카는 알마가 다른 남자와 새로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광적인 이상 행동이 시작됐습니다. 당대 유명한 인형 제작자에게 알마의 인형을 만들어 달라고 한 뒤 사람 옷을 입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겁니다.
1931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히틀러 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프라하로 옮겨갔다.
독일에서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하여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조차 금지되었다.
알마 쉰들러(Almz Schindler/1879-1964)는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화가인 아버지 에밀 쉰들러 덕분에 예술적 소양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한 때는 클림트와 이탈리아로 도망가서 살 생각까지 했다고 하니 둘의 관계 역시 핑크빛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스무 살 이상의 나이차가 꽤 많이 나는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부인이 되었고(그래서 '알마 말러'라고 불렸다), 가부장적이었던 말로는 그녀가 자신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줄까봐 불안해하고 늘 전전긍긍했다. 그의 걱정은 뜬구름이 아니었다. 실제로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브 말러가 죽기 전부터 다른 남자와 연애하고 있었다.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다. 뿐만 아니라 작가 프란츠 베르펠도 그녀의 연인이었다. 구스타브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 코코슈카 이 네 명의 남자는 늘 그녀를 잊지 못했고, 특히 화가이자 6살 연하의 남자친구였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자 군에 입대했고 1916년 1차 세계대전 중에 뇌에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구스타브 말러가 세상을 떠난 후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결혼을 했고 그와 헤어진 후에는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했다.
알마 말러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더라도 오스카 코코슈카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닮은 등신대 인형을 만들어 옆에 두고,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드레스도 맞춰 입혔다고 한다. 또한 그 인형을 마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고, 증오심이 생기면 인형을 때리기도 해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훗날 주민들은 그가 시체와 함께 산다고 착각을 해 경찰에 신고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위의 작품은 그가 인형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이 쯤 되면 그의 사랑은 안타깝지만 지독한 집착수준이다. 코코슈카는 40년이 흘러 알마 쉰들러가 할머니가 되었어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의 70세 생일날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랑스런 알마, 난 아직도 당신의 길들이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우리는 '바람의 신부'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 관계의 종말과 새로운 삶의 시작
코코슈카와 알마의 관계는 결국 이별로 끝났다. 알마는 1911년 남편인 말러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코코슈카는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지만, 알마는 코코슈카의 예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코코슈카는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해 제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올다 팔코프스카(Olda Palkovska)와 결혼했다. 그리고 1946년 영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주요 도시의 전경과 초상화, 나치주의에 항거하는 정치적 이념이 담긴 포스터를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코코슈카와 올다는 1953년 스위스 레만 호수 근처의 빌뇌브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레만 호를 그린 평화로운 풍경화를 남겼다.
코코슈카는 1980년 스위스 몽트뢰에서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 결론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의 독특한 예술적 표현과 강렬한 감정으로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예술의 힘을 보여줍니다.
● 참고 자료
위키백과 - 오스카 코코슈카
네이버 블로그 - 오스카 코코슈카
메트로신문 메트로신문